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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국호(國號)문제에 관하여

차후 찬후 2015.08.31 00:26




발해의 정식 국호가 무엇이며, 그 기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 바. 그에 관하여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최초 대조영은 나라를 개국하며, 국호를 '진국왕'이라 칭하였다.(구당서+신당서)

이 '진'이라는 국호는 아마도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에서 난을 일으킬때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을 모아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요동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당나라 조정이 회유책의 일종으로 수여한 관직(걸걸중상=진국공 / 걸사비우=허국공)에 기인하였다고 보여진다.

(실제 걸걸중상은 '진국공'이라는 관작을 받아들였으나, 걸사비우는 '허국공'이라는 관작을 거부하였으며, 당군의 추격과정에서 걸사비우가 사망하고 비슷한 시기에 걸걸중상이 병사하자, 그 무리를 대조영이 이끌어 동모산으로 이동하며, 천문령 넘어로 진군해오는 당군을 격파한다.)

 

개국과정에서 대조영은 아버지 걸걸중상이 수여받은 '진국공'이 아닌 '진국왕'이라는 칭호를 자칭 하는데, 이는 당나라 조정이 수여한 '진'이라는 관호를 따르며 당나라 조정에 일종의 친선에 관한 외교적 신호를 보내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왕'을 칭한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의 입장에서는 당나라 태종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생을 치루며 결국 정복한 이민족 국가인 고구려의 무리이면서 스스로 '왕'을 창힌 대조영과 그 무리를 인정 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고구려 후계를 자처하는 대조영의 무리를 인정하는것은 당나라의 황금기를 이룬 당 태종과 고종의 고구려 정복을 후대가 부정하는 모양이 되기때문)

 

때문에 당나라는 스스로 왕을 칭한 대조영과 그 무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진국공이라는 관직의 승계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조영의 무리가 고구려의 승계 세력이라는 점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구려'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동북지방 이민족의 멸칭인 '말갈'을 붙여 '발해만 너머의 말갈'이라는 의미에서 대조영과 그 무리를 '발해말갈'이라고 부르게 된다.

 

당시 당나라는 사방을 동이, 서융, 북적, 남만으로 칭하였는데, 이러한 칭호는 특정 종족을 부르는 말이 아닌 그 방향에 위치한 여러 제민족들을 통칭하는 개념이었고, 동북아 일대에서는 거란+실위+해족을 '북적'으로 부르면서, 고구려+신라+말갈을 '동이'라고 칭하였다.

(즉, 고구려와 말갈을 북적이 아닌 동이인 별개의 민족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당나라가 굳이 '발해말갈'로 대조영과 그 무리를 표현한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돌궐과 거란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군사적 행동을 취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미개한 종족으로서의 멸칭인 '말갈'을 의도적으로 붙여, 자기 위안을 삼은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나라에서도 당시 고구려유민+말갈족의 결합인 대조영의 무리적 성격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예로 <구당서>에서는 발해의 풍습을 '말갈'이 아닌 '고구려'와 같았다고 스스로 대조영의 무리가 말갈이 아닌 고구려와 더욱 연관성을 가지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당나라는 거란과 돌궐의 배후에 위치하여 일종의 견제 수단으로서 대조영을 주목하면서 705년 책봉을 시도하였으나, 돌궐과 거란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이후 다시 713년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에 책봉한다.

 

우선 '좌효위대장군'은 당나라 중앙군 절충부를 통솔하는 16위 장군호중 하나이며, '홀한주 도독'은 대조영의 지배영역을 기미주의 일종인 '홀한주'로 편제하고, 그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한 관호로서 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은 그의 독자적인 지배영역과 군사력을 인정하는 관호라고 할 수 있다.

 

(유사한 경우로 신라역시 문무왕대에 이르러 좌위대장군+계림주대도독+신라왕을 제수받은바 있으며, 이러한 관작은 이후 신라왕에게 세습된다.)

 

문제는 '발해군왕'의 칭호인데, 신라의 경우 당나라가 수여한 관호에 신라 스스로가 칭한 '신라왕'의 칭호를 인정한 반면, 대조영의 경우 자칭호인 '진국왕'의 칭호가 아닌 한단계 낮은 등급의 '군왕'으로서 당나라가 대조영의 세력을 비하하는 '발해말갈'과 결합하여, '발해말갈의 군왕'이라는 의미의 발해군왕에 봉하게 되는데, 대조영의 판단으로는 당과 무력적 충돌보다는 내실의 기반을 다질 필요성으로 이러한 발해군왕의 칭호를 받아들인다.

 

('발해'라는 이름을 살펴보면, 첫번째로 등장하는것이 한나라 기주지방에 위치한 발해군으로 주성은 남피였고,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소가 태수로 있던 지역이다. 두번째로 유추가능한것은 황해 북쪽의 발해만에서 기인한 이름이며, 세번째로 '넓은 바다'라는 일반명사로서의 발해이다. 만주지방에 위차한 대조영을 유주지방에 위치한 발해군의 왕으로 임명할 일은 없으니 당연히 발해군이라는 지명에서 기인 할 일은 없고(물론 이렇게 생각해 볼수도 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해서 그 지역을 차지한 돌궐이나 거란과 충돌 시키고자 하는 당나라 조정의 전략적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일설에는 발해라는 이름을 대조영이 건국을 경박호(=홀한해)인근에서 시작하였기에 말갈과 고구려의 연합적인 정권의 특성을 고려하여 편향성을 경계 할 목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지명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주장하나 초기에 대조영의 무리는 발해라는 이름을 자칭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고, 발해라는 이름의 등장은 당나라가 칭한 발해말갈이 최초였다고 보여진다.)

 

대조영이 발해군왕 등의 칭호를 받아들이며 당나라에 순응하는 모습을 취하자, 그에대한 대응적인 조취로 당나라 조정에서도 멸칭으로 쓰였던, '말갈'이라는 표현을 뺀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대조영과 그 세력을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발해군왕'의 국호와 관호는 고왕-무왕을 거쳐 문왕에 이르게 되는데, 이 시기까지 대조영과 그 세력은 대외적으로는 스스로를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이시기까지의 '발해'라는 이름은 당나라를 상대할때나 부르던 이름이었고, 스스로는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문왕대에 취해진 적극적인 친당정책으로 천보연간에 발해군왕의 관작에 정2품의 '특진'을 추가로 제수받고, 안사의 난이 발생하자, 반란군 배후에 위치한 발해의 견제세력으로서의 필요성과 당나라 영향력에서 발해가 벗어날것을 경계한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발해국왕'에 진봉시키게 되는데, 이때부터 '대진', '고려', '발해' 등의 국호를 병존하여 표기되던 것에서 '발해'로 단일화된 국호를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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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 프로필사진 감사합이다 2017.12.24 15:34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발해역사를 이해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여 하나 덧붙이자면 유득공이 지은 발해고(송기호 옮김)와 비교하였을 때 다른 점이 보여 글 남깁니다. 걸사비우가 당군의 추적과정에서 죽었다고 나왔있는데 그 무럅 걸걸중상도 이미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 대조영 혼자 탈출하자 이해고가 그를 뒤쫓았지만 대조영은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격파하여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 발해고/유득공/송기호옮김/홍익출판사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s://sso3208.tistory.com BlogIcon 차후 찬후 2018.01.06 23:58 신고 "그 무리를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이끌어 동모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부분에 오류가 있는건 사실이기에 수정하겠습니다. 걸사비우가 전투중 사망할때 걸걸중상 역시 비슷한 시기에 병사하고 그 무리를 대조영이 이끌었다고 신당서+신오대사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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