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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속 기간에 대하여

소하 찬후 2016.06.05 22:26

흔히들 말할때 한국사에서 존속했던 국가들의 존속 기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구한 점을 들어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망해야 할 국가가 안망하고 존속한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비아냥 대는 부류의 사람을 쉽게 접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대표적으로 조선을 이야기 하며,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 개혁을 진행했어야 일본에게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는 논리로 흐른다.)

 

이 두가지 관점은 일정부분 맞는 주장이라 어느쪽이 딱히 틀렸다고 결론 맺기 힘들지만, 이러한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한가지 특징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이고, 특히 조선사에 있어서 이러한 특징이 더욱 드러나는데, 바로 국가의 운영 시스템이다.

 

조선이라는 국가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자....

 

조선은 1392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무장세력과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창업파 신진사대부가 결합하여 건국된 국가로서, 고려 역시 국가운영 시스템은 유교를 표방했지만(고유학 중심), 조선은 국가운영 시스템은 물론 민간 윤리에까지 유교적 윤리를 도입하여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다.(신유학인 성리학)

 

특히 건국초기 국가의 운영 체제를 어떠한 방향으로 할것인가를 두고 태종 이방원과 정도전이 극렬하게 대립하였는데, 태종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 중심의 일원적인 국가 운영을 주장하였고, 정도전은 국왕의 절대성은 인정하나, 국가운영에 있어서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재상을 중심으로 왕실과 별개로 실무적인 국가운영을 담당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이러한 대립의 와중에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의 뜻에 순응하기도 하고 반하기도 하면서 정도전과 그 무리를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며, 왕을 중심 실무자들에게 직접 정사를 운영하도록 하는 6조 직계제를 정착시키며, 후에 세조가 이를 승계한다.

 

(6조 직계제라는 것은 결국 왕명이 실무부서인 6조의 관리들에게 직접적으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고, 6조의 보고가 다른 곳을 거치지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정책 실행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훌륭하나, 왕의 개인적 능력에 의하여 그 효율성이 좌우되며, 특히 국왕 1인에 대하여 과도한 업무가 몰린다.)

 

그러나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이러한 6조 직계제보다는 왕과 실무부서인 6조 사이에 의정부를 거치도록 함으로서 왕에 대한 업무의 집중을 분산시키고, 정책운영에 대한 다양한 의견수렴과 견제가 가능 하도록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도입한다. 물론 이러한 의정부 서사제의 도입이 세종 본인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부분은 절대로 아니며, 세종은 유교적 군주상을 이상적인 군주의 형태로 보았고, 그러한 형태의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가고자 하였다.

 

물론 이러한 국가 체제는 세조대에 이르러 다시 6조직계제로 환원되기도 하는 등의 부침이 있었으나, 조선 초기 왕권과 신권을 둘러싸고 여러차례의 변화를 거쳐오다, 결정적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신하들의 택군(擇君)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후 전개되는 조선의 국가 시스택은 신권 우위의 국가운영 체계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국왕 중심의 왕정국가시대에 신하들의 선택에 의하여 왕조의 교체없이 왕이 선발 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체험 했던 조선은 이후 계속적으로 신권우위의 성향을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고려말 정몽주를 중심으로 했던 수성파 신진사대부가 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면서 새롭게 변모한다.

 

사림들은 훈구파로 변모한 세력들 보다 더욱 강력하게 유교적 군주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왕에게 요구하였다.

 

중국에서도 찾기 힘든 '강연'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세자시절부터 왕에서 유교적 철학을 갖춘 철인(哲人)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고, 이는 왕에 즉위한 이후에도 조강(朝講), 석강(夕講) 등의 이름으로 끊임없는 자기 학습을 강요하였다.

 

물론 왕 중에서도 세종과 정조는 이러한 점을 적극 이용하여, 신권을 억누르는 방법으로 이용 하였는데, 철저하고 끊임없는 유학 공부를 통하여, 강연에서 신하들과 치열한 논쟁을 주고 받으며,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의 타당성을 인정받고,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유교적 논리로 논파하면서 신하들이 반발 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없애버렸다. 도리어 유학을 배운 신하들이 유교적 소양이 부족하다며 다그쳐 집권하고 있는 세력 이외의 인물들이 정치권에 진입 할 수 있도록 집현전이나 규장각 등의 인재등용 창구를 만들기도 하였다.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신권을 중심으로하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왕 중심의 최고 집권층은 고려와 다르게 일원적인 전국단위 행정체계를 구축하게되는데, 중앙은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각종 기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지방은 8도 단위로 지역을 구분하고, 8도에는 관찰사를 파견하고, 관찰사가 직접 감독하게 하는 부-목-군-현을 설치하여 수령을 파견하고, 여기에 더욱 들어가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는 자치 조직인 면과 리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5가구를 묶어 관리하는 오가작통법을 별도로 제정하여 지방 말단까지 통치력을 확장하였다.

 

동시대에 조선 처럼 지방의 말단 조직에 이르기 까지 중앙의 통치력이 미친 국가는 중국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국가 운영체제는 치밀하고 정교하게 조직되어 운영되었다.

 

이러한 정교한 시스템은 구축하기도 어렵지만, 한번 완비되면 붕괴되기도 어려운데, 극단적인 예시로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이, 명나라 말기 무렵 만력제 집권기를 들 수 있다.

 

조선과 명나라 모두 유교적 원리에 기반한 국가 체계를 채택하고 운영해 나갔지만, 서로 차이점을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권력을 왕권과 신권 어느쪽이 가지고 있는가이다.

 

초기 명나라는 홍무제 주원장이 즉위와 정난의 변을 거처 즉위한 영락제 주체를 거치며 황권이 신권을 압도하면서 황제 일인 독제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동일한 국왕 중심의 국가였던 조선이 '경연' 등의 제도를 통해서 신하들에게 끊임없이 교육 받고 군사부일체의 유교사회에서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경연에서 신하들을 스승으로 대하였던 모습과 비교하면, 중국의 황제는 일인 독재권력을 발휘하는 존재였으며, 모든 정책의 최종 결정자이자, 그 어떠한 반론도 불허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황권에 눌리기는 하였으나, 조선 이상으로 관료적 성향의 국가 체제가 완비된 중국에서 만력제 즉위기간 황제는 태업 내지 모든 정사를 포기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이 장장 20년가까지 지속되었음에도 명나라의 국가운영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북로남왜라는 예외적인 변수와 이른바 '소빙하기'라는 재난이 닥치기는 하였지만, 명나라 라고하는 국가는 평상시대로 운영되었다. 조선과 달리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된 체제에서 황제가 모든 업무를 중단하였어도, 평시 국가운영 체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이 사례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그 그닝을 다했던 시스템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조선은 왕정 국가이지만, 권력의 집중이 중국보다 분권적이었으며, 이는 국왕 개인의 능력과 국가운영이 비례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데, 능력있는 왕이 국가를 운영한다면, 집중된 권력이 좋겠지만, 그런 능력있는 왕이 이룬 수십년간의 업적도 무능한 왕이 몇년만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볼때, 조선은 국왕 개인의 능력 보다는 전문화된 관료집단에 의한 분권화된 국가운영이 이루어 졌다고 보는게 타당 할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술용어로 가산적 왕정체제가 아닌 관인중심의 지배체제가 이루어졌다고 정의한다.

 

더불어 조선은 훈구와 사림, 동인과 서인의 끊임없는 치열한 국가운영의 방법론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일제시대에는 이를 당파성론으로 정의하여 이른바 '당쟁'이라고 폄훼하였으나, 실제적으로 따져보자면, 어떠한 목적과 방법론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 할 것인가에 대한 집권계층의 대립으로 보아야 할 부분이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에서 주요 쟁점은 왕권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 할것인가? 신권중심의 전문가 집단으로 국가를 운영 할것인가가 주요 쟁점이었고, 동인과 서인의 대립에 있어서도, 훈구와 사림의 대립 보다는 완화되었지만, 왕권과 신권중 어느쪽의 우위로 국가를 운영 할것인가에 대한 대립이었다.

 

특히 이후에 행해진 남인과 서인의 예송 논쟁은 이러한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 대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왕사 동례-부동례 논쟁에서 중종반정 이후 정설로 굳어진 왕도 결국 사대부중 한명이라는 왕사 동례라는 입장과 왕은 사대부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왕사 부동례라는 입장이 대립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왕사 동례라는 입장은 주로 서인계열이 취하였는데, 이는 극단적으로 나가면, 왕도 결국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어쩌다 왕이된 평범한 사람중 하나라일 뿐이라는 결론에 귀결하게 되는 논리로 소위 조선 후기 나라를 말아먹은 세력이라 칭해지는 '노론사관'이라 칭해지는 세력이 주장한 개념이다. 왕정국가에서 왕이 일반인과 차이가 없는 평범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상은 근대에 서양의 주류로 자리잡은 민주주의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평할 수도 있다.

 

또한 예송 논쟁에서는 왕도 결국 사대부중 한명을 분이라는 왕사 동례 입장이 승리하게 되는데....이런 세력이 이후 노론사관으로 칭해지며, 조선 근대화를 막은 세력으로 칭해지는 걸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 포스팅의 주제인 국가 존속 기간에 대한 평가 부분으로 돌아가면, 흔히 조선의 국가 존속기간이 400여년에 가까운건 절대로 자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임진왜란 전후로 국가가 망하고, 새로운 세력이 중심이 되어 국가가 들어 섰어야 한다고들 한다.

 

본인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데, 실질적으로 왜란(임진-정유)이라는 대외 변수는 조선을 망하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이후에 더해진 호란은 안망한게 더 이상한 국가적 변수였다.

 

이러한 양란은 조선 전체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불러 왔다.

 

공명첩과 요호부민의 등장으로 신분제가 동요하고, 세정의 기준이 세대기준(호 단위)에서 재산기준(토지단위)로 변모하는 대동법이 시행되며, 기존 신유학의 주류인 성리학과는 또 다른 양명학이 전래되는 등의 극심한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나타나고, 의정부-6조 중심의 중앙체제는 비변사 중심의 체제로 변화하게 되는 등 다방면에 걸친 변화가 이루어 지기게되는데, 이때 중요한 점은 양란 전 완벽하게 자리잡은 국가운영체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시대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이 점은 비판 받을 수 있겠지만, 다른 방향에서 조선건국 200년간 이루어진 국가 관료 체제의 완성은 그 자체로 완벽하였다는 면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왕실이 자리한 한양에서 지방 말단의 자치조직인 면-리까지 즉각적으로 도달 할 수 있는 조선의 정치행정 시스템은 사실상 발전할 수 있는 형태의 최종 정착지였다.

이러한 국가 통제 원리는 현대에 와서도 신기술의 도입으로 기술적인 측면은 변화하였지만, 그 근본 원리는 동일하다.

 

이러한 형태의 중앙통치를 뒷받침 해주는 관료제와 상비군의 등장은 서양의 경우 근대에 들어서 절대왕정 시기에나 가능하게 된다.

 

물론 현대의 국가의 존속 목표와(민주원리에 따른 국민의 권리보호) 조선의 국가 존속 목표는(왕실 단위의 국가 통치) 결코 같다고 할수 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의 차이점은 있을 지언정 방법론에 있어서는 조선의 통치체제의 완결성이나 현대 국가의 통치체제 원리의 완결성은 그 수준이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바는 바로 이것이다.

 

조선이 다른 동 시대의 다른 국가들 보다 왕조의 교체 없이 지속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어느 국가들 보다 발달한 관인중심의 지배체제가 완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상적(민권의 성장), 경제적, 기술적으로 이러한 망하고도 남을 역사적 사건에 직면했던 국가가 망하지 않은것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측면에서는 여러 논의가 진행 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동시대 어느 국가들 보다 선진적이고 정교한 국가 통치 체계가 완비되어 운영되었던 것이 조선이라는 측면은 우리모두 인정해야 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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